=====51:1
하나님이여...긍휼히 여기시며 -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은 여기서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호칭을 '여호와'가 아닌 '엘로힘'(* )으로 사용하고 있다(54:1;55:1;56:1;57:1;59:1;60:1;61:1;63:1;64:1;65:1).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여호와'가 아니라 '엘로힘'으로 표현한 까닭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가치도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Rawlinson). 한편 '긍휼히여기시며'(* , 하난)는 '은혜를 베푸시며'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창 33:5;민 6:25;사 30:18). 주의 인자를 좇아-문자적으로는 '당신의 인자를 따라서'의 뜻이다. '인자'( , 헤세드)는 본질적으로 언약 관계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이 말이 사람에게 쓰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뜻하는 반면, 하나님께 쓰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확실한 약속'혹은 '언약적 신실성'(26:3)을 의미한다(A. A. Anderson).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 이처럼 다윗이 앞에서 '인자'를 언급하고도 다시 '많은 자비'를 말한 것은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암시적으로 고백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큰 죄인은 평범한 종류의 '인자' 혹은 '자비'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Calvin).
내 죄과를 도말(途抹)하소서 - 이것은 본절이 두 개의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로 이뤄져있다는 점에서, 앞 부분의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죄과'(* , 페솨)는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뜻한다(Delitzsch, Weiser).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죄과'를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1) 밧세바와의 간통(삼하 11:2-4) (2) 그 남편 우리아 살해(삼하 11:14-17) 등 두가지의 죄를 범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 한편 '도말하소서'(* , 므헤)는 '문지르다', '부드럽게 하다', '없애다'는 뜻이며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차용증서를 없앨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범죄 사실을 지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69:28;출 32:32). 한편 고대 바벨론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그 범죄 사실을 토판(土版)에 기록했고, 용서를 받았을 경우에는 그 토판을 깨어버렸다고 한다(Kraus).
=====51:2
여기서도 1절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 간청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죄의 오점을 여러 번 씻어야 할 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Calvin).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 '죄악'(* , 아온)은 '구부리다', '왜곡하다'는 뜻의 '아와'(* )에서 유래한 말로 '사악함', '왜곡'의 의미이다(Delitzsch).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악한 의도'를 가리킨다(L. Kohler). 그리고 '씻기시며'의 '카바스'(* )는 원래 '짓밟다'라는 뜻인데 옷감을 발로 밟아서 씻는다는 의미에서 '씻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9:10, 14;삼하 19:24). 상징적으로 렘 2:22에서는 본문에서처럼 죄악을 씻어 없앤다는 뜻으로 쓰였다. 구약의 희생 제사와 정화 의식은 죄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여기서 '죄'(* , 헤트)는 '빗나가다', '상실하다', '범죄하다'는 뜻의 '하타'(* )에서 유래한 말로 '범죄', '과오' 혹은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깨끗이 제하소서'(* , 타헤르)는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적으로도 정결하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이다(레 13:6, 13). 이것은 곧 다윗이 죄의 오염을 나병만큼이나 무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1:3
대저(* , 키) - '왜냐하면'의 뜻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절은 다윗이 1,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를 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부분인 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죄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본절과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1, 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가 진실되며 또한 간절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동사 '아오니'(* , 에다)가 본 문구의 주어가 1인칭 단수임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1인칭 단수인칭대명사 '나는'(* , 아니)을 덧붙이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A.Cohen). 한편'아오니'의 기본형인 '야다'(* )는 단순한 지적(知的) 앎이 아닌 체험적 앎을 가리킨다(호 6:3주제 강해, '야다'의 개념). 결국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뼈에 사무칠 만큼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사이다.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 문자 그대로 사람에게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범죄가 인간에 대한 것이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의미이다(삼하 12:13). 이것은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의 통간(通姦)을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수 있다(창 39:9, Rawlinson). 이같이 이웃에 대한 범죄가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창 1:26;9:6)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래서 그 이웃에 대한 범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인 것이다(Kidner, Keil, Kraus).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감찰되었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이는 (1) 밧세바와의 통간 후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애쓰는 등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태도(삼하 11:6-15) (2) 우리아까지 죽이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영적 불감증의 태도(삼하 12:1-6)와 날카롭게 대조된다(Kidner).
주께서 말씀하실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신다고 해도, 그 정죄는 자신의 범죄에 기인한것이므로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롬 3:4). 여기서 '말씀하실'(* , 다바르)은, 본 문구가 다음 구와 쌍을 이루는 동의 대구법적 표현의 한부분이라는 점에서, 다음 문구의 '판단하실'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뜻임이 분명하다. 한편 '의로우시다 하고'(* , 차다크)는 '올바르다', '정결하다' 혹은 '의롭다'의 뜻으로서, 언행이나 생각에 있어서 전혀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143:2;욥 9:15). 결국 본문은 다윗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정죄받아 마땅함을 인정하는 고백적 표현이라 하겠다. 사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통한하나님의 정죄를 달게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했었다(삼하 12:13).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 앞의 문구와 거의 비슷한 뜻이다. 여기서 '판단하실'(* , 솨파트)은 '재판하다', '판결하다' 혹은 '징벌하다'등의 뜻(레 19:15;삿 11:27;대하 20:12)을 갖는 법정적 용어로서. 특히 여기서는 죄가있음을 선고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순전하시다'(* , 자카)는 죄나 잘못이 없는 내면적 정결의 상태를 가리킨다(욥 15:14;잠 20:9;미 6:11).
=====51:5
본절에서도 1-4절에서처럼 동의적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같이 하여 다윗은 자신이 죄악된 본성의 소유자임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이 독신주의를 옹호하거나 결혼 생활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본절이 과연 원죄의 교리(a doctrine of original sin)를 명확히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단언을 내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편 기자가 자신의 존재의 시작으로부터 인간의 죄성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자각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러한 죄악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죄의 은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A. A. Anderson).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 이는 하나님께서 정결 의식을 통한 깨끗함(레 15:16-18)이나 율법 준수를 통한 외면적 경건(빌 3:6)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내면적 깨끗함까지도 성도들에게 요구하신다는 뜻이다(Rawlinson). 여기서 '진실함'(* , 에메트)은 '기대다' 혹은 '양육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만'(*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하나님께 대한 성실하고 충성된 마음 자세를 가리킨다(대하 31:20;느 7:2;렘 23:28). 그리고 '중심'(* , 투호트)은 '덮다'를 뜻하는 동사 '투아흐'(* )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원래는 '신장'(腎臟)을 의미한다. '신장'이 바로 이 같은 동사에서 유래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장기(臟器)의 윗 부분이 지방질로 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이 '신장'을 애정의 좌소(坐所)로보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신장'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 '속에'(* , 베사툼)는 (1) '비밀하게'(Weiser) (2) '은밀한 곳에서'(Calvin, Rawlinson, Kraus, Keil)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여기의 '속에'는 앞 문구의 '중심에'와 대칭이 되므로 '중심에'와 거의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한편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는 하나의 기원문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은 죄를 혐오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죄의 특별한 사악성을 깨달을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Weiser). 다윗은 그러한 깨달음은 개인적 묵상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적인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Kraus).
=====51:7
본절부터 9절까지 다윗은 사죄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 기도문 속에는 기자가 1,2절에서 사용했던 두 단어('도말하소서', '씻기시며')가 뒤바뀐 순서로 거듭 나타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소 - 여기서 '우슬초'는 문등병에서 완쾌되어 부정(不淨)의 상태에서 벗어난 자가 자신의 몸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 데(레 14:4) 혹은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물을 찍어 뿌렸던 정결 의식과(민 19:18) 관련하여 사용했던 식물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이 (1) 자신의 죄악이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요일 1:9)을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눈보다 희리이다 - 온전한 사죄의 은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사 1:18).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 여기서 기자는 기쁨의 회복을 간구한다.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함으로써 생기는 희락을 가리키며(롬 5:1) 그것은 곧 구원의 기쁨을 뜻한다(9:14;13:5;35:9). 그러기에 이 기쁨의 출처는 하나님께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W. A. VanGemeren). '즐겁고 기쁜 소리'는 사죄가 됐다는 하나님의 선포와 그가 바라던 구원의 약속을 가리킨다(Weiser). 그 당시 다윗은 죄책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머지 극심한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같은 '즐겁고 기쁜 소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었다(사 52:7;롬 10:15).
주께서 꺽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주께서 꺾으신 뼈'는 죄책으로 짓눌린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의 영혼을 가리킨다(Weiser). 이와 같은 비유적 표현은 자신의 영적 고통이 지대(至大)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뼈'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 신체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으로. 그리고 사람에게서 가장 큰 통점(痛點)이 있는 부분으로시사되고 있기 때문이다(6:2;사 58:11;렘 23:9). 한편 '꺾으신'(* , 다카)은 '짓이김을 당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너뜨려진'혹은 '죄를 깊이 뉘우치는'의 뜻을 지닌다.
=====51:9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 1절의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와 거의 유사한 문구이다. 다윗은 이러한 문구로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죄를 위한 기도를 마무리 짓게 되며, 이후로부터는 간구의 초점을 '구원'에다 맞춘다.
=====51:10
여기서부터 12절까지 다윗은 다윗 자신이 새로운 삶을 사는 데(13절) 반드시 필요한 심령의 갱신을 간구하고 있다. 3-5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심도깊게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통찰을 통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간절히 회복을 간구하고 있다. 여기에 신앙인 다윗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kIDNER).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여기서 '정한 마음'은 범죄의 욕구를 물리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성령에 의해서 변화된 심령을 가리킨다. 한편 '창조하시고'(* , 바라)는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산출해 내는 경우에 사용된 동사이다(창 1:1). 다윗은 바로 이 같은 동사를 과감히 사용함으로써,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6절) 삶을 사는데 있어서 자신의 타락한 옛성품은 전혀 무의미함을 강력히 시사하며 (2) 아울러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은혜로써만 가능함을 나타낸다(kIDNER).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여기서 '정직한 영'(* , 루아흐 나콘)에 대해서는 (1) 다윗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성령'이라는 견해(Cavin) (2) 다윗이 이미 갖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견해(박윤선) (3) 다윗이 지금까지의 변덕스러운 마음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새로 받게 될 '변함없는 마음'이라는 견해(Kraus) (4) 하나님의 은총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심령(마음)을 뜻한다는 견해(A. A. Anderson)등 그 해석이 다양하다. 그러나 첫째, 본절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두 대구(對句)로서 표현되었으며 둘째, 완전한 인격자이신 성령은 갱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셋째, 본 문구의 '새롭게 하소서'(* , 하다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온전케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삼상 11:14;대하 24:4;사 61:4)는 점 등에서 볼 때, 위의 네 견해 중 (4)의 것이 가장 타당하다. 즉, 여기서 다윗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은 자신의 '영'이지만, 더욱 새롭게 갱신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며(57:7;112:7) 또한 굳건해질(78:37) 수 있는 것이다(C. B. Moll).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 '주 앞'은 문자적으로 '주의 면전(面前)에서 '의 뜻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어 그분의 은총과 얼굴의 빛을 받지도 못하게 되는 일(창 4:14;왕하 13:23)이 없게끔 해달라는 간구이다(Rawlinson) 다윗은 이처럼 자신이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는 형벌만은 내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성신'(* , 루아흐 카도쉬)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사 63:10-14에서처럼 본문에서도 이 말은 여호와의 임재를 뜻하는 일반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그 즉시 부어주셨던 성령으로 이해함이 더 자연스럽겠다(삼상 16:13). 하나님은 사무엘에 의하여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지명되게 하시고 그가 왕으로서의 내면적 자질을 지닐 수 있게끔 그에게 '성신'을 주셨다. 다윗은 바로 이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의 심령을 변화(삼상 10:6-9)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겔 36:27) 더 깊은 영적 교제(엡 6:14)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성신'의 감동을 무시한 채 극악한 죄를 범하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처럼 하나님의 '성신'을 받았던 사울왕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그 '성신'을 빼앗기고(삼상16:14) 이에 따라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버림받은 삶을 살았던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처럼 '성신'이 떠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다윗에게 본 문구와 같은 간구는 지극히 당연하다. 한편, 계시의 조명이 상대적으로 희미했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긴 죄사함과 영적 갱신의 확신을 갖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희생 제사등을 통해 나름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있었음에 분명하다(W. A. VanGemeren). 영적 갱신은 항상 경건과 신령한 지혜에 이르게 한다(신 5:29;30:6;사 59:21;렘 31:33, 34;겔 36:26, 27).
=====51:12
본절의 간구는 11절의 간구보다 더 진전된 것 혹은 보다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사실상 11절의 간구가 응답됐을때만 이러한 간구가 가능하겠기 때문이다.
구원의 즐거움을...회복시키고 - '구원의 즐거움'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Calvin, Weiser) 심령의 기쁨이다. 바로 이것은 다윗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원동력이었다(Weiser). 한편 '회복시키고'(* , 하쉬바)의 원형인 '슈브'(* )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행동을 가리킨다(창 18:33;룻 1:15;삼상 5:11). 따라서 본 단어는 다윗이 이전에 '구원의 즐거움'을 맛본 경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Alexander).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 여기서 '자원하는'(* , 네디바)은 '재촉하다', '지원하다', '아낌없이 바치다'를 뜻하는 동사 '나다브'(* )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렘 24:7;31:33;32:39;겔 36:25-27).
=====51:13
그러하면 - 엄밀히 말해서 원문에는 없는 말이지만 본절과 14절의 내용이 11, 12절의 간구가 응답됐을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삽입이라 하겠다.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라 - 이것은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감사 행위 그 이상이자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게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행 4:20). 이처럼 새로운 삶이란 경건 그 자체를 즐기거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개인적인 기쁨에 만족하는 이기적 태도가 아니다(Weiser). 오히려 자신처럼 하나님께 범죄하여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죄인들에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어야 한다(눅22:32). 여기서 '주의 도'(* , 데라케이카)는 문자적으로 '당신의 도'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25:4) 혹은 그러한 삶의 지침이 되는 교훈(25:8)을 가리킨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말한다(119:33).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 다윗이 이미 경험한 바 있는 이 같은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돌아오리이다'(* , 야슈부)는 12절의 '회복시키시고'와 그 어근이 동일한 말이다. 이처럼 다윗은 동일한 어근의 두 동사를 나란히 사용함으로써, 먼저 사죄의 은총을 받은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죄인으로 하여금 사죄의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행 9:21, 22).
=====51:14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건지소서 - 다윗은 앞에서 사죄를 위한 간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하여 애원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것(요일 1:9)을 의심해서 이 같은 모습을 보인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너무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그로 인하여 고통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피 흘린 죄'(* , 다밈)는 문자적으로 '피들'이란 뜻이다. 바로 이와같은 문자적 의미 때문에 학자들은이 '피들'을 (1) 우리아 살해에 따른 복수자들의 다윗 자신에 대한 암살 의도(Hitzig, Weiser, JB, RSV 난하주) (2) 우리아 살해의 죄악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극악한 질병을 주어 그를 죽게하시려는 의도(Kraus) (3) 다윗의 우리아 살해의 죄악 자체(Kidner, Keil, Rawlinson, Calvin)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첫째, 본장의 주요한 분위기는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간절히 몸부림치는 것이며 둘째, 본절의 '구원'과 동일한 어근의 단어가 영적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12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견해 중 (3)의 것이 타당하다(Kidner).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 '주의 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을 뜻한다(31:1;71:2;창 15:6). 만일 다윗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서 징벌을 면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의(義)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롬 3:22) 때문이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게되었으므로, 그러한 의를 자신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 '주'(* , 아도나이)는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런데 이 명칭은 그 기본적 의미가 '주'(主) 혹은 '주인'이며 백성에 대해서는 '군주'(삼상 25:19),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창 18:12), 노예에 대해서는 '주인'(출 21:5)을 가리킨다. 이처럼 이 단어에는 위엄과 지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바로 이 같은 의미가 담긴 하나님의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적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Kraus, Weiser). 즉, 다윗은 본절에서와 같은 자신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으며,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다만 바라고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는 (1)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찬송할 수 있도록 자신을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Rawlinson, Keil, Kidner) (2) 담대하게 찬송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새 마음(10절), 곧 성령의 감동을 허락해달라는 간구(Calvin, C. B. Moll, Kraus, Weiser)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둘 다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본장 전체가 참회를 그 주제로 삼고 있으며, 또한 본절의 앞뒤 구절 모두 죄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두견해 중 (1)의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듯하다.
=====51:16
여기와 다음 절에서는, 언약 백성의 증표라고 할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단히중요한 신앙적 요소였던 '제사'보다도 더 우선되는 것이 제사드리는 자의 마음 상태임을 선언하고 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온전치 못하고 의식만을 중시하는 경향을 싫어하셨다는 뜻이다(삼상 15:22;사 1:11-17;렘 7:21-26;호 6:6;암 5:21-24;미 6:6-8). 희생 제사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배경하에서만 그 의의를 발휘할 수있다. 따라서 그 언약적 관계가 인간의 범죄로 인해 깨뜨려진다면 희생 제사나 다른 어떤 의식절차도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기자는 자신의 죄악이(살인과 간음) 그것을 속할만한 희생 제사에 관한 규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럴 경우 유일한 방법은 회개밖에 없으며, 이 죄를 용서받는 길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만 달려 있다(A. A. Anderson).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 여기서 '상한 심령'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1) 자신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자임을 절감하며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견해(Calvin. C. B. Moll. Keil) (2)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은 가운데 과거의 죄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아픔을 간직하는 마음이라는 견해(Hengstenberg, Rawlinson) 등의 해석이 있다. 그러한 본 시편 전체가 사죄를 위한 간구에 해당되며. 특히 본절과 16절은 하나님께 범죄한 다윗이 아직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51:18
혹자(Kraus, Weiser)는 본절과 다음절의 내용이 급작스럽게 변화하고 있음을 중시하여 이 부분이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의 어떤 사람에 의하여 덧붙여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같이 무리한 것을 취하기보다는, 다윗이 참회기도 중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거기에 살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했었다고 봄이 더 나을 것이다.
주의 은택으로 - '은택'(* , 라촌)은 '기뻐하다' 혹은 '친절하게 받아들이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 '라차'(*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은택으로'는 '기뻐하시는 뜻대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스 10:11;에 1:8;단 11:36).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 여기서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및 우리아 살해 등 자신의 죄악의 결과 자신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지지나 않을지를 염려하고 있다(삼하 12:10). 한편 '시온'은 예루살렘 동쪽의 구릉지대로서, 특히 시편에서 '예루살렘'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된다(2:6;9:11;14:7;48:2;87:2;128:5 등).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포로 후기 시대의 느헤미야에 의한 성벽 재건 사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Kraus, Weiser).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결코 타당치 않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음으로써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성취했기 때문이다(왕상 3:1). 아무튼 다윗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반드시 필요했던 성벽을 쌓고자 했던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좌절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Rawlinson).
=====51:19
그 때(* , 아즈) - 이것은 '그 결과로써' 혹은 '그리하여'의 뜻이다(출 15:15;왕상 9:11). 주께서...온전한 변제를 기뻐하시리니 - 이것은 다윗이 사죄의 은총을 입은 다음부터는 자신과 백성들의 제사가 '온전해지도록'하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온전한'(* , 칼릴)은 '모두' 혹은 '전부'의 뜻으로서, 빠진 부분이나 결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출 28:31;39:22;삿 20:40). 보다 구체적으로는 '제물은 물론 제사드리는 자의 마음도 함께 드려지는'이란 의미이다(16, 17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 '수소'는 본절의 '제사'와 '번제'가 구약 제사 형태의 대표적 표현이듯이(16절) 하나님께 드려지던 여러중류의 짐승 모두를 함축적으로 가리킴이 분명하다. 특히 '수소'는 주로 온 회중이 참여하는 귀한 제사의 제물로서 사용되었다(삼하 24:22-25;왕상 8:63;대상 29:21;대하 7:5;스 6:17).
본 시편은 애절하고도 가슴 아픈 참회의 시이다. 이처럼 다윗이 처절하리만치 애통
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럴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다윗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목욕하고 잇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
고 음심(淫心)을 품은 나머지 간통죄를 범하고 말았다(삼하 11:2-4). 뿐만 아니라 다
윗은 밧세바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에는 그 잉태가 그녀의
남편 우리아에 의한 것인 양 조작할 목적으로 전선(戰線)에 있던 그를 소환하여 그로
하여금 밧세바와 동침케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즉, 우리아는 모든 군사들이 전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만이 아내와 동침하는 일은 불가(不可)하다며, 다윗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였던 것이다(삼하 11:9-11). 이처럼 밧세바의 잉태가 우리아에 의한 것
인 양 일을 꾸미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윗은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전선에
서 죽게 만들었다(삼하 11:14-17).
그러나 범죄 당시에 다윗은 완전 범죄를 하였다고 느긋하게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 一投足)을 낱낱이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
의 악한 소위(所謂)를 모두 알고 계셨다(17:3;94: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 나
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하셨다(삼하 12:1-7, 13).
그리하여 다윗은 나단 선지자을 통하여 죄인됨을 깨닫고 본 시편과 같은 회개의 기도
를 하나님께 올린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치 않을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삼하 12:!3).
사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신정(新正) 왕국의 왕으로 특별히 선택된 다윗(삼하
7:8)에게 더 높은 거룩의 수준을 기대하셨을 것이다. 적어도 다윗은 하나님의 대리자
로서 그분의 거룩함과 공의를 이 세상에서 밝히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윗은 그토록 흉악한 범죄를 저지름과 동시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회개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다윗이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면하려 한 것은, 단순히 생명
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윗은 신정 왕국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자신의 과업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파멸은 곧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
던 하나님의 계획마저 수정케 하는 큰 불충(不忠)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사죄의 은총
을 내리셨다.
아울러 우리는 다윗이 이처럼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그의 회개가 진
실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치 말아야 한다.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죄가 무
엇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지적(知的)인 요소와, 그 죄로 인하여 진실로 애통해 하는(마
5:4) 정적(靜寂)인 요소,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의지적
(意志的) 요소가 온전히 포함된, 그야말로 전인격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회개
는 하나님의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였으며, 참된 회개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모범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 같은 본 시편에서 저자 다윗은, 우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자
비와 용서를 간구한다(1-4절). 그리고는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만한 능
력이 없음을 토로하면서, 정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자신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
화시켜 주시길 호소한다(5-12절).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사람을 새롭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차후로는 새로운 모습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윗은 기도를 드린다(13-19절).
우리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 신자들은 그 어떠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실수로 인하여 좌절하기 이전에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하며(롬 8:31-39), (2) 하나님께 대한 회개 기도가 열납될지의
여부는 오직 그 회개 기도의 질(質) 여하에 달렸음(32:5)을 깨닫게 된다.
1. 사죄를 비는 기도(51:1-4)
다윗은 하나님께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회개에 앞서 자신
에게 전제(前提)되어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았다. 즉, 그는 그토록 쓰라린 양심의 가책
을 느끼면서도 진실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실 것을 담대히 믿었던
것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나아갈 수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
에(롬3:23)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간구할 하등의 자격도 갖고 있지 못하다. 자연 상태
의 인간은 자신의 그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겔 18:4), 그러
나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그분의 '자비' 곧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에 근거
하여, 사죄의 은총을 간구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만일 다윗에게 이러한 통찰력
이 없었다면, 사죄의 은총도 구하지 못한 채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회개가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중
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컸던지를 너무나도 분명
히 인식했다는 것이다. 사실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죄가 얼마나 컸던지를 너무나도 분
명히 인식했다는 것이다. 사실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죄를 극악하다고 보는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하다. 그는 남의 아내를 간통했고, 그 사실의 은폐(隱蔽)를 위하여 그 남편
을 죽였다. 그런데도 한때 그는 자신의 그 사악한 행위를 절실히 뉘우치지도 않았던
몰염치한 영적 불감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달게 받아
들였다. 그는 나단의 책망을 거울로 하여, 자신의 죄가 얼마나 컸는지를 비춰볼 수 있
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만일 그가 계속 자신의 죄
를 숨기려 들었다면, 그에게 돌아올 것은 죽음의 형벌뿐 이었다. 그가 회개를 조금만
더 늦추었어도, 그에 대한 형벌(삼하 12:!0-14)은 더욱 무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는 신속히 그리고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1)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분과의 관계 회복도 빠르며(요일 1:6-9), (2) 자신의 죄인됨을 절실히 깨닫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폭적 변화의 삶을 살 수 있음을(마 26:75) 깨닫게 된다.
2. 심령의 변화를 간구하는 기도(51:5-12)
앞 단락에서 자신의 범죄 사실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백하며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
를 간절히 기도했던 다윗은,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심령의
근본적 변화를 탄원한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시인한다(6절). 즉, 범죄할
수밖에 없는 실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연약성과 유한성을 통절히 고백한
다윗은, 이어서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심령을 갱신시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
구한다(7-12절).
사실 이와같이 다윗이, 전적 부패를 호소하면서 더 이상 범죄치 않기 위한 필수 요
건으로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비록 다윗이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자백함으로써(1-4절) 과거의 죄악들을 용서받는다고 할지라도, 앞으
로도 얼마든지 또다시 범죄에 빠져들 가능성이 많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포함한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선(善)을 행하고 범죄를 피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잇었다(롬 3:12). 그래서 다윗은, 죄 용서를 구함과 동시에
더 이상 흉악한 죄를 범치 않게끔 근본적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신학적 용어를 빌자
면 이것은 중생시켜 달라는 호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성령 충만을 염원하는 간구로 보아
야 한다.
사실 다윗은 이미 성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1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이해할 만큼 독실(篤實)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다윗은 어던
이유에서였는지 인잔적 욕망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
한 채 육욕(肉慾)에 이끌려 살다가 큰 죄를 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금번의 범죄를 통하여 다윗은,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절감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인간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계 3:1). 비록 중생은 하였어도, 성령 충만하여 그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면 여
전히 육적(肉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전 3:1-3).
우리는 본 단락을 통하여 (1) 신자들도 성령의 통제 아래 있지 아니하면 필연적으로
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으며(요 8:34; 롬 6:16; 벧후 2:19), (2)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적 능력을 상실할 경우 그것을 회복하는 데는 보다 큰 수고와 고통이 수반되며(히
6:4-6), (3) 죄를 피하려는 노력보다는 죄를 이길 능력을 받는 일이 더 중요함(히
12:4)을 깨닫게 된다.
* 구약 시대의 성령 내주(內住). 다윗의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
절)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약 시대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단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에도 성
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령 내주의 의미
'성령 내주'는,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을 중생시키면서(요 3:5) 그 사람을 구원하시
기 위한 보증자가 되어(고후 1:22;5:5) 그를 성전 삼아(고전 3:16;6:19) 그가 죽을 때
까지 그안에 계속 계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령께서 어떤 사람의 안에 한번 '내
주'하시기 시작하면, 그분께서는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신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내주'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성령의 내주'가 중생의 후속적 결과라는
사실이다.
2. 구약 시대 성도에게 중생이 있었는지의 여부
아담의 모든 후예들은 예외없이 영적으로 부패된 채 태어난다(롬 5:12). 따라서 모
든 사람 특히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
한다(롬 8:15;고전 12:3). 그런데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께 경배
를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중생이 있었다고 단정해야
할 것이다.
3.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의 여부
우리는 이미 성령의 내주는 중생의 결과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구약 시대의 사람
들에게도 중생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성령의 내주도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다만 계시의
점진성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해 볼 때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장차 임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면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외면적으로 볼 때 제한적이고 잠정적 형태로 임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신약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성령의 역사
는 항상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단지 구약 시대에는 계시의 빛이 적었기 때
문에 좀 희미한 형태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구약 성도들이 성령의
중생 사역과 내주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같은 사역이 존재
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3. 삶의 변화를 다짐하는 기도(51:13-19)
앞 단락에서 삶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근본 대책을 하나님께 간구했던 다윗은, 여기
서 이제 변화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헌신의 기도를 한다. 즉, 다윗은 먼저 범죄자
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다짐하며(13절),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
겠노라고 다짐한다(14절).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전파할 것을 결단하였다(14
절).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제의적(祭衣的) 의무도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
다. 사실 본 시편을 진정한 회개 기도의 모범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
은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다짐하는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죄의 고백
이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그야말로 회개란 죄의 고백뿐만 아니라. 더 이상 죄에 머물
지 않고 개과천선(改過遷善) 하겠다는 굳은 다짐과 노력이 있을 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 혁신의 굳은 각오를 일관되게 실현시켜 가기란 너무도 힘들다. 인
간은 그 연약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서약을 번복할 가능성이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죄악과 철저히 분리되는 삶을 살겠다는 기도를 회개와 함께 하여야 한다. 그래
야만 비록 부족하더라도 자신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다윗의 자기 혁신을 위한 다짐과 노력은, 회개와 범죄를 거듭
반복하여 살아가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귀감(龜鑑)이 될 수 있음이 분명
하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힘입어 피나는 영적 투쟁을 할 때 온전한 삶에로 전진 할 수 있으며(빌 2:12;히 12:1), (2) 신자들은 자신의 헌신이 부분적으로 실천되지 못하더라도 크게 낙심치 말고 그것을 오히려 자기 혁신의 발파능로 삼아 계속 신앙의 경주에 주력해야 함(딤후 4:7)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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