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
본 시편부터 83편까지는 '아삽의 시'이다. '아삽'은 다윗과 동(同)시대의 인물로서,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樂士)들의 수석(首席)이었다(대상 25:1). 하나님(* , 엘로힘)- 본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한다. 저자는 바로이 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주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 '참으로'(* , 아크)는 본 문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Calvin). 저자는이전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부정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꼈음에분명하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부정한 자 곧 압살롬의 득세에 따른 것일 수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불의한 자가 흥왕하고 의로운 자가 오히려 쇠망하는 현실의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신앙적 투쟁(13-16절) 끝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애매히 고난을 받은 동방의 의인 욥이 영적 갈등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발전된 새로운 시각을 소유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욥 42:5).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바는 인간의 외면적인 요소곧 외모가 아니라 내면적 요소 곧 그 중심임을 암시한다(삼상 16:7;왕상 8:39;빌3:3). 사실,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께 패역한 행위를 일삼던 자들이얼마나 많았던가 !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고 교회에 출입하지만,실제로 구원받을 자는 일부분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마 7:21;눅 13:22-30). 한편'마음이 정결한 자'는 (1) 마음에서 죄의 추잡함과 불결함을 제해버린 자(Delitzsch),(2) 하나님께 대하여 외식적이지 아니하며 간사함이 없는(요 1:47) 참된 예배자(Calvin)등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73: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 악인의 형통을 목격하고(3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했던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한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적은 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도 신앙적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신앙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결국 저자는 배교(背敎)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73:3
이는(* , 키) - '왜냐하면'이란 뜻의 접속사로서, 본절이 2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 여기서 '보고'(* , 에르에)의 기본형 '라아'(* )는 세심한 관찰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삼상 17:28;23:23;왕하 7:14;사 63:15). 따라서 본 문구는, 저자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처지를 동경하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의 '형통'(* , 솰롬)은 보통 '안녕' 혹은 '평강'의 뜻이지만,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까지도 포함된다. 본 문맥에서는, 건강의 축복(4절)과 물질의 축복(7절)을 주로 가리킨다.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 '질시하였음이로다'(* , 키네티)의 기본형 '카나'(* )는 '질투하다' 혹은 '부러워하다'의 뜻으로서, 소유물이나 세상적 가치들에 대해 파괴적일 만큼 강렬한 시샘을 가리킨다(창 30:1;37:11;잠 27:4). 또 '오만한 자'(* , 흘림)는 '높이다' 혹은 '찬양하다'의 뜻인 동사 '할람'(* )에서 파생된 명사형 분사이다. 따라서 '오만한 자'는 악인이 형통하게 됨에 따라 스스로 지극히 교만해진 마음의 상태를 강조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다. 본절의 '악인'은 처음부터 사악한 성품을 많이 갖고 있기는 했지만 부귀가 없었을 때는 교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재물이 많아지자 그 사악한 성품을 토양으로 하는 교만함의 싹이 트고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지극히 높이려는 자가 된 것이다(6절). 이와는 달리 의로운 자는, 비록 부귀를 누리게 된다 해도, 자신을 높이려는 어리석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의로운 자는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진정한 지혜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잠 1:7).
=====73:4
여기서부터 12절까지에서는, 악인의 형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말해 준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로 번역함이 더 나으리라 본다(all through life their road is smooth, LB). 즉, 평생 동안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 문구에 대한 바로 이와 같은 해석은, 본 문구의 동의적 대구(對句)인 다음 문구와도 내용상 잘 어울린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 , 하르추보트)은 '족쇄'(사 58:6), '결박'등의 뜻이며,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각양의 고난을 가리키는 듯하다. 물론 질병도 포함될 것이다.
그 힘이 건강하며 - 평생 동안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이같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반드시 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병이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아야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69:5).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에게 아무런 고난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재앙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까지 육체에 가시를 주셨고(고후 12:7), 그 가시를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후 12:9, 10).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 질병 등과 같은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축복의 하나이며,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은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73:5
본절은 악인의 형통을 좀 과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 악인들은, 보통 사람들이면 으레 겪게 되는 '고난'에서도 예외라는 말이다. 과연 모든 악인들이 다 이와같이 전혀 '고난'을 당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 그렇지는 않다. 다만 시인은, 그토록 악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가시적인 어떤 징벌을 받지 않고 거만하게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이와같이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난'(* , 아말)은 덧없고무상한 세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시련을 가리킨다(90:10, Ronald B. Allen).
재앙(* , 예누가우) - 이것은 '만지다' 혹은 '치다'를 뜻하는 '나가'(*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런데 이 '나가'라는 동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징벌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107:18).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징벌적 성격을띠는 여러 환난들에 대한 총괄적 용어임이 분명하다.
=====73:6
악인들이 형통하게 됨에 따라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악인들은 그 형통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패역을 행하는 것이다.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 이에 대해서는 (1) '목걸이'를 삶의 모양을 좌우하는 삶의 경향으로 보고, 악인들은 개가 목걸이에 의해서 질질 끌려다니듯이 교만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라는 해석(C.B. Moll, Hengstenberg), (2) '목걸이'를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물로 보고, 악인들은 교만한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특별한 인물인 듯이 행세한다는 뜻이라는 해석(Calvin)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본 문구의 동의적 대구(對句)인 다음 문구의 '옷'이 신분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둘째,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목걸이'를 장식을 위한 수단으로 말하고 있다(잠 1:9;아 4:9)는 점 등에서,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하다.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 악인들이 '강포'를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허무한 탁월성을 과시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 문구의 해석을 참조하라. 한편, 로린슨(Rawlinson)은 본 문구를 사람들이 항상 옷을 입고 다니듯 악인들이 '강포'를 다반사로 행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어느 정도 가능한 해석이다(109:18, 19).
=====73: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 눈두덩이 불쑥 나와 보일 정도로 피둥피둥하게 살쪘다는 의미이다(Their eyes swell out with fatness, RSV). 한편 70인역(LXX)과 시리아역은 '눈'을 '범죄'로 번역하여 본 구절을 '살찜으로부터 그들의 죄악이 나온다'(from fat comes forth their guilt)라고 해석하며, 또 어떤 학자는 '솟아나며'를 '빛나다'는 의미로 보고 '그들의 눈이 번영으로 인해 빛난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Dahood).
=====73:8』
'베'(* )와 '타인을 해치려는 부도덕한 성품'(잠 15:3) 혹은 '난폭한 행위'(신 17:5;삼상 2:23;왕상 16:7;겔 20:44;30:12)를 뜻하는 '라'(* )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압제'(* , 오쉐크)는 '압박하다' 혹은 '폭력을 행사하다'를 뜻하는 '아솨크'(*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권력이나 권위의 남용, 즉 낮은 위치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든지 혹은 억누르고 짓밟는 행위를 가리킨다(Ronald B. Allen). 따라서 본 문구는 극도로 악랄한 언어의 폭력을 통하여 상대방을 모멸하는 것을 뜻한다.
거만히(* , 밈마롬) - '...로부터'의 뜻인 '민'(* )과 '높음'을 뜻하는 '마롬'(*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높은 곳으로부터'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자신은 높은 사람인 듯 행세하고 상대는 비천한 존재로 얕잡아 보면서'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73: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 이에 대해서는 (1) 악인들이 하나님께도 거만한 말을 하였다고 보는 해석(Calvin, Deltzsch), (2) 악인들이 마치 하늘에라도 올라갔던 사람들이나 되는 양(사 14:13) 그래서 위대한 진리라도 소유하고 있는 듯이 거만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C.B Moll) 등이 있다. 그러나 10, 11절이 악인들을 추종하여 그들의 거짓된 주장에 매혹된 백성들에 관한 지적임을 고려할 때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타당하다.
저희 혀는 땅에 두르다니도다 - 앞의 문구가 거만한 마음으로 자기의 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반면, 여기서는 악인들이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을 열심으로 퍼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73:10
그러므로 - 본절이 9절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 이것은 '백성'이 악인들의 새로운 주의와 주장에 현혹되어 그들의 추종자가 된 것을 말해 준다. '백성'이 악인들의 주의와 주장을 따르게 된 것은, 그들의 형통(3절)을 부러워하였고, 또한 그 형통의 사실을 그들이 진리를 소유한 자임을 확증해 주는 증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백성'(* , 암)은 '대단히 큰 무리' 혹은 '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아삽의 시대에 수많은 백성들의 배교(背敎)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날에도 외적인 풍성 혹은 부흥을, 진리를 소유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진리를 가장한 비진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배교의 현상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 있을 것이다.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 악인들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이 악인들의 행동을 답습하는 것을 가리킨다(욥 15:16). 새로운 추종자들은, 악인들이 내세우는 모든 것들을 마치 참된 생명수라도 되는 양 모두 마시었다. 즉, 그들의 악행을 답습한 것이다.
=====73:11
하나님이 어찌 알랴 -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되 하나님을 인간 역사와는 무관한 존재로 생각한다. 물론 그 추종자들이 원래부터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는 신정 국가의 백성들인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웠다. 그러나 그 지식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배교자들은, 악인들을 좇아 악행을 저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악행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 '지극히 높은 자'(* , 엘룐)는 세상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 주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97:9;창 14:19;신 32:8;단 7:18). 그러나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본 명칭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치 아니하시는 분 곧 인간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말하는 데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님의 명칭을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73:12
항상 평안하고 - 악인들이 불법을 일삼으며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고 아무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재물은 더 하도다 - 7절 주석 참조.
====73: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 저자가 경건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교만하기 그지없는 악인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 자신이 곧 경건한 삶을 살았는데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고 하는 한탄이다. 악인은 불의한 삶을 사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도 받은 듯이 형통한 반면, 저자 자신은 경건한 삶을 사는데도 현실적인 부귀를 누리기는 커녕 오히려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14절) 이같이 극심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손을 씽는다는 것은 죄악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욥 9:30).
=====73: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 저자는 까닭을 알 길 없는 재앙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등 신앙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그 신앙 인격을 정금같이 단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편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마치 욥이 죄가 없었음에도 고난을 당한 것과 같다(욥 33:19). 그러나 욥은 이러한 연단을 거침으로써 영육간에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욥 42:5, 6, 12-17).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 '징책'(* , 토카흐티)은 '책망하다', '교정하다'의 뜻을 갖는 '야카흐'(*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랑을 근거로 하여 회개를 촉구키 위한 징벌 행위를 가리킨다(욥 5:17;잠 3:12;사 1:16-20). 비록 저자가 '손을 씻는'등 깨끗하게 살려고 했지만, 그래도 저자는 때때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69:5;욥 9:30,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억울한 듯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큰 죄악을 범해도 형통하지만(12절) 자신은 조그만 허물로 인해서도 툭하면 징계를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침마다'는 마치 하나님이 저자를 위해 매일 징벌을 준비하신 듯한 느낌을 저자가 받았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저자는 악인의 형통을 목격하면서 당하는 징계였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매일' 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73:15
본절에서 저자는 (1)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었다는 사실, 그러나 (2) 그 의심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그래서 다른 배교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사실을 말한다.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에대하여 의심을 품었는데, '이 의심하던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발설할 마음을 굳혔다면'이라는 가정이다. 따라서 이 가정은, 저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은 했으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심지어 말할 결심까지도 아니했음을 암시한다.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 저자가 하나님의 공의에대한 의심을 발설하려는 결심이, 결국 어떤 잘못인지를 말해 준다. '주의 아들들의 시대' 중 '시대'(* , 도르)는 '시간'(時間)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특별한 그러나 유사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민 32:13;신 1:35). 따라서 '주의 아들들의 시대'는, 악인들에 동조하여배교를 했던 자들(10절)과는 구별되는 의로운 무리들을 가리킨다(14:5;왕상 19:18).한편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 바가드티)의 기본형 '바가드'(* )는'신의없이 다루다'의 뜻으로서, 잘못된 행동이나 말로써 상대를 실족케 하는 행동을가리킨다(욥 6:15).
=====73:16
저자는, 악인을 형통케 하시고 도리어 의인에게는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였으나, 스스로의 고민으로는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전 8:17).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 '심히 곤란하더니'(* , 아말)는 '노동하다' 혹은 '애쓰다'의 뜻으로서, 노동의 어두운 측면 곧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취가 없다는 측면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따라서 '심히 곤란하더니'는 노력에 따른 수고의 대가가 없음으로 말미암은 극심한 마음의 고통 혹은 슬픔을 의미한다(삿 10:16;욥 16:2;렙 20:18).
=====73:17
여기서는, 한동안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악인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저자가 드디어 거기에 대한 답을 얻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깨달았나이다.
-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책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저자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악인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었다. 저자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실패한 까닭은 (1) 인간의 지혜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할 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그러한 지혜를 의지하였으며, (2)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이미 갖고 있음으로 인하여 그와 동시에 그의 영지(靈智)는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계시 의존 사색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희 결국 - 저자가 깨달은 바가, 악인들의 최종적 운명에 관한 것이었음을 말한다. 사실 저자가 알기 원했던 것도 악인들의 미래사(未來事)였다. 즉, 저자는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악인들을 형통케 하실 것인지를 궁금해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 저자의 눈으로는, 그들이 더욱 형통해 갈 것 같았고 끝까지 멸망당하지 않을 듯했었다.
=====73:18
여기서부터 20절까지는, 17절에 나오는 '저희 결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말한다. 주께서...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 '두시며'(* , 타쉬트)는 '위치시키다' 혹은 '놓다'를 뜻하는 '쉬이트'(* )의 미완료형으로서, 여기서는 현재 진행형의 의미로 번역함이 적절하다(What a slippery path they are on, LB).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는 악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형통이 곧 그들에게는 '미끄러운 곳'에 해당됨을 암시한다. 사실 악인들은 그 형통으로 인하여 극도로 교만하여졌고, 그 교만은 그들을 결국 패망케 할 수밖에 없다는(잠 16:18) 점에서, 그들의 형통은 곧 그들에게 '미끄러운 곳'임에 틀림없다.
파멸에 던지시니 - '파멸'(* , 마슈오트)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 단어는 '지옥'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35:8;74:3;욥 30:3;38:27).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주로 사후(死後)에 철저하고도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사실 악인들 중 평생 동안 형통하게 살고 그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물리적 징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반면에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징벌을 받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잠 11:31). 그 실례로 (1) 다윗에게 반역하고서 한동안 흥왕하였던 압살롬은 그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리므로 요압의 군대에 의하여 비참한 죽임을 당했으며(삼하 15:13;18:9-15), (2)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의 두려운 죄 가운데로 빠뜨리면서도 오랫동안 권세를 휘둘렀던 이세벧도 결국 개의 밥이 되었고(왕하 9:30-37). (3)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소유한 유다의 왕통을 끊으려 했던 아달랴도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칼에 의하여 응징되었고(왕 11:1, 13-20), 또한 (4) 성전에서 돼지고기로 제물을 삼게 했던 셀류키드 왕조의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는 원정 중 죽임을 당하였다. 사실 그 외에도 악행을 일삼으면서 한때 형통하였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완전하고도 철저한 응징은 사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시행되어질 것이다.
=====73:19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 '어찌 그리'(* , 에크)라는 감탄사는, 저자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악인들의 파멸이 이루어짐을 강조하며, '졸지에'(* , 케라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의 뜻이다(잠 12:19). 그리고 '황폐되었는가'(* , 사포)의 기본형 '수프'(* )는 '끝내다' 혹은 '그치다'의 뜻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렘 8:13), 특별히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심판에 대하여(사 66:17;습 1:2 이하) 자주 사용된다.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 '놀람으로'는 악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응징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예상 밖이었음을 말해 준다(Calvin).
====73:20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 사람들은 꿈을 꾸는 동안에는 꿈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치 사실처럼 여기고 슬퍼하거나 즐거워하지만, 일단 꿈에서 '깬 후에는'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슬퍼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자는 바로 이와 같은 뜻의 비유를 통하여, 저자 자신이 악인의 형통을 목도하고 부러워하며(3절) 심히 고민했었던 것(16절)은 마치 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과 같이 무시해야 할 대상에 불과함을 암시한다(Calvin).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 '주께서 깨신'은 악인의 횡포에 대하여 인내하기를 그치시고 때가 되매 그들을 심판하실 자리에 좌정하시는 것을 가리킨다(35:23). 한편 '형상'(* , 첼렘)은 '외면적인 것', '환영'(their phantoms, RSV) 혹은 '환상'(fantasies, NIV) 등을 뜻한다. 따라서 본 저자는, 악인들의 형통이 다만 그림자와 같이 헛된 것일 뿐 실체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1) 세상의 가치들은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보장해 줄 능력이 없으며, 또한 (2) 그것들은 세상 끝날에는 모두 사라져버릴 것들(벧후 3:10)이라는 점에서 타당하다.
=====73:21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저자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던 것을 자책하는 모습이 나온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 '산란하며'(* , 이트하메츠)의 기본형인 '하메츠'(* )는 '시어지다' 혹은 '발효하다'의 뜻으로서 떡반죽이 누룩에 의하여 부푸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함으로 말미암은 불평이, 누룩 들어간 반죽이 잔뜩 부풀어 오르듯이 극심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Calvin).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 '찔렸나이다'(* , 에쉬토난)의 기본형 '솨난'(* )은 '갈다' 혹은 '날카롭게 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심장'이라는 목적어와 합하여져서 마치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격심한 마음의 고통을 가리킨다. 한편, '심장'(* , 킬르요트)은 '몹시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인 '칼라'(* )에서 파생되었다. 이처럼 '심장'이라는 단어의 언근이 '매우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일 수 있는 까닭은, 심장이 인간의 욕망이나 소원의 좌소(座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Calvin).
=====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 자신이 왜 하나님의 공의를 잠시 잠깐이나마 의심하고 또 하나님께 불평했었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준다. 그런데 '우매 무지하니'라는 말 중에서 '우매'(* , 바아르)는 '짐승'을 뜻하는 '베이르'(* )에서 파생했으며, 마치 짐승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려 완강히 버티는 완악한 사람을 가리킨다(TDOT). 한편 '무지하니'(* , 로 에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14:4). 이와 같은 몰지각한 상태는 앞의 '우매'와 다음 문구의 '짐승'이라는 단어들의 뜻과 잘 통한다.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 여기의 '짐승'(* , 베헤모트)은 욥 40:15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덩치를 한 동물로서 대단한 어리석음의 상징인 하마나 물소를 뜻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아무런 이해력도 갖고 있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저자의 과장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 저자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교(10절)에 이르지는 아니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같은 저자가 배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다음 문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었다.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 '오른손'은 '왼손'보다 힘이 더 강한 손(사 41:10)이라는 점에서,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특별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붙드셨나이다'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된다(18:35;119: 117;사 41:10).
=====73:24
하나님께 불평한 일에 대한 회개(21, 22절)을 마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에게 임할 것을 확신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 '교훈'(* , 아차트)은 '충고하다', '조언하다'의 뜻인 '야아츠'(*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권고'로도 번역되었다(잠 12:15). 그리고 '인도하시고'(* , 타느헤니)의 기본형인 '나하'(* )는 '안내하다'의 뜻이 있으며, '목적지로 무리를 이끌고 가다'는 뜻인 '나하그'(* )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본문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 혹은 견인(堅忍)을 보장하시기 위한 성도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를 위하여 '교훈'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딤후 3:15, 16). 성도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곁길로 갈 가능성이 많다. 고난을 당한다거나 혹은 유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때때로 신앙의 발걸음을 주춤하거나 심지어 실족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성도의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개인에 대한 '인도'의 섭리를 펼치고 계신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 '후에는'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싸움을 다 싸운 다음에는'의 뜻이다(딤후 4:7). 그리고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는, 하나님께서 기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접하시리니'(* , 티카헤니)의 기본형 '라카흐'(* )는 창 5:24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에녹을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가신 사실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 오직 하나님만이 저자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되신다는 뜻이다. 물론 '하늘'에는 천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천사들도 온전한 의뢰의 대상은 못 되며,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영광으로 영접'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 여기서도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일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모할 자'(* , 하파츠티)의 기본형 '하페츠'(* )는 '...을 기뻐하다'의 뜻으로서, 어떤 상태를 기뻐하며 에게 큰 호의를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 나이가 들거나 혹은 질병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쇠약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고난을 받음으로 인하여 지극히 조악한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때에는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지를 절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반석'(* , 추르)은 쉽사리 오르기 곤란할 정도의 높은 바위를 뜻한다. 따라서 여기의 '반석'은 의인이 원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만 오를 수 있는 피난처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평화와 위로 그리고 소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 한편, '분깃'은 인간을 행복하고 풍족하게 살게 해주는 삶의 터전을 의미한다(미 2:4;합 1:16;슥 2:12).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만이 우리를 유복하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한 하나님만이 행복의 근원이심을 말한다(Calvin). 이처럼 하나님을 우리 성도의 '분깃'으로 말하는 경우는 성경 전체 그리고 특히 시편에 많이 나타난다(16:5;119:57;142:5;애 3: 24).
=====73:27
대저(* , 키) - '왜냐하면'이란 뜻의 접속사로서, 본절과 다음절이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반석'과 '분깃'으로 삼아야(26절)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 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멀리하는 것은 그분과의 단절 곧 죽음을 택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주를 멀리하는 것'은 본 시편의 문맥상 '배교'를 의미한다(10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 '음녀'는 자신의 본래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정(情)을 통하는 여자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교제 의무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상징한다(106:39). 한편, '멸하셨나이다'(* , 히츠마타)는 완료형이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현재 시제로 번역해도 무난하겠다(NIV, RSV).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영적 '음녀'에 대한 심판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도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27절), 그 반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함' 곧 그 분을 '반석'과 '분깃'으로 인정하는 것(26절)은 '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맥상 여기의 '복'은 다분히 내세적이어서(24절) 사람들에 의해서 선호되지 아니한다. 사람들은 대개 당장 눈에 보이는 형통만을 좋아하며 좇는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배교하기에 이르르며, 심지어 본 저자도 그럴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다(15절). 그러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형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좇는 자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금생과 내생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24절).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 영적 '음녀'들은 우상 혹은 이 세상의 방법을 자신들의 '피난처'로 삼는다. 하지만 본 시편 저자는, 참 하나님을 의지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가시적인 이 세상의 형통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형통를 맛보기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 여호와'(* , 아도나이 예화) 중 '주'는 하나님의 범우주적 통치 혹은 거기에 대한 주재권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언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한다. 그런점에서 여기의 '주 여호와'란 명칭은, 하나님이 저자의 미래를 온전히 보장하고도 남음이 있으신 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본시는 제3권의 첫 번째 시로서 고난에 처해 있는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회의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고백하고 있다. 37, 49편과 더불어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시의 특징은 앞선 두 개의 시가 악인의 번영에 대한 산 자의 태도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좀더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시인의 상황과 감정을 숨김없이 묘사함으로써 세상의 유혹에 직면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더욱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악인이 누리는 세상적 축복의 있는 성도들에게 더욱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악인이 누리는 세상적 축복의 무가치함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궁극적 복락을 실감있게 제시해 준다.
본시의 저자에 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표제문에 나타난 대로 아삽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칼빈(Calvin)은 아삽이 단지 악사로서 다윗의 시의 연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윗 당시의 성전 찬양대의 수석(대상16:4-6)이었던 아삽이 본시를 포함한 제3권 가운데 있는 열 한편의 시의 저자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본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본시의 주제 또한 한정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보편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다만 우리는 아삽이 정결한 삶을 영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처하게 되었을 때,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느끼는 마음을 시로 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교만과 강포(强暴)로 가득 차 있는 악인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탄과 분노를 넘어서서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그들의 편에 동조하여 현세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배교(背敎)의 유혹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고통스러운 투쟁을 겪으면서 악인이 누리는 현세적 형통의 허무함을 깨닫고, 의인의 궁극적 구원을 확신하며 본시는 노래하고 있다.
한편 본 시편의 장르는 일반적으로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란 주제를 다룬 '지혜시'로 알려져 있다. 어떤 학자들은 시인의 개인적 고백과 감정을 다룬 '비탄시',혹은 고난으로부터의 구원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음으로 인한 '감사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시는 세속적 번영과 무가치함과 하나님 나라의 참 소망을 교훈 하는 '지혜시'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또한 본시는 내용에 의해 크게 악인의 형통에 대해 고민하는 전반부(1-14절), 악인과 의인의 궁극적 운명을 생각하며 신앙적 해답을 발견하는 후반부(15-28)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본시를 좀더 구조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17절을 분수령으로 하여 전, 후반부가 매우 조직적으로 대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 2절과 18절은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대상이 의인과 악인으로 대조된다. 4-7절과 23-27절은 악인의 세상적 형통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의 진정한 축복을 비교한다. 13-16절과 28절은 시인의 마음이 의심에서 신앙과 결단으로 변화됨을 나타낸다.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시인은 참된 복이 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평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석되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 즉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본 시편을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악인의 번영으로 인한 고뇌(73:1-14)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낙담한 시인의 마음과 감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본연은, 의인과 악인의 삶을 비교하면서 발생하는 시인의 의혹이 솔직하게 표현되고 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결한 그의 백성들에게 항상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선언적으로 진술한다(1절). 그는 결론을 먼저 말하고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현재 발생하는 의심과 해결의 과정을 기술함으로써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시인이 어떻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의문과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정당성을 확신하게 되는지에 대해 단계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이제 본연을 좀더 세분하여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악인에 대한 질투(2,3절):하나님의 최종적 정의와 사랑을 고백한 시인은 여기서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즉 자신은 악인의 번영에 대해 충격을 받았으며 근원적인 신앙까지 흔들리는 강렬한 유혹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현재 자신의 내면적 상태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사실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면 경건하게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시인은 자신이 인간적인 비료를 통해서 몹시 흔들리고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시인은 현재 침체의 늪에 빠져서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쓰라림을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함으로 낙담하고 있는 시인을 보면서 어떠한 신앙인도 세상적 가치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면 마음과 평안과 행복을 소유할 수 없음을 자각할 수 있다(엠4:17;5:6-14). 사실 우리는 시인의 고백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를 바라보며 모든 유혹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갈2:20;빌3:12-14;히12:1,2).
2 악인의 상태(4-9절):시인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인을 핍박하는 악인들이 세상 적인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악락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간다고 불평한다.
까 악인들은 불행, 약함, 질병, 노동 등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통에서 면제되어 있다(4,5절). 그들은 건강하며 아픔 곳이 없고 일상적인 삶 속에 어떠한 고난이나 재난을 겪지 않으면 자신들의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또한 그들의 산업은 날로 번창하여 부귀 영화를 끊없이 누리고 있다.
다 악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하게 자신을 뽐내며 살아간다(6절). 이러한 교만은 좀더 적극적인 상태로 발전하여 횡포와 폭력으로 의인들을 압제하고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신성 모독의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악행의 점층적인 발전 단계를 보게 된다. 교만에서 횡포와 폭력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시인은 이러한 악인들의 방자한 태도가 삶의 번성과 평안과 안락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만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방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커다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적인 부요함이 오히려 멸망의 지름길이 될 수 있고, 고난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갖가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배우게 된다. 아울러 하나님의 진노는 오히려 악인들을 죄악 속에 방치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롬1:28).
3 악인의 영향력(10,11절):교만한 악인의 번영과 함께 시인을 더욱 낙심하게 만드는 사실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며 조롱하는 것이다. 더구나 악인들의 달콤한 유혹은 강력한 영향력이 있어 순진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타락시킨다. 악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동하며 하나님을 저주하고 백성들을 현혹한다. 많은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권세와 영화와 번영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더 많은 재물을 모은다고 비관적으로 묘사하였다(12절).
4 시인의 한탄(12-14절):이제 시인은 앞에서 기술한 악인의 영향력과 권세를, 하나님만을 경배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회의에 빠진다. 시인은 자신이 성결하게 살아온 것이 무가치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정직하게 불의에 항거해 온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알고 계시는가? 시인은 악인의 형통과 비교해 볼 때 끊임없이 고난에 처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다. 신인은 자기에게 닥쳐온 외적인 고난과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으로 내적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시인의 한탄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이나 유혹이 언제나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사단은 논리적인 설득력과 반박할 수 없는 실증을 제시하며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물론 유혹에 이끌리는 자체가 곧 범죄라고 몰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극복해야 한다. 사실 시인은 우리에게 자신이 그 시험을 어떻게 이겼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면 깊숙한 곳까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2. 세상적 유혹에 대한 극복(73:15-28)
악인이 누리는 번영으로 인하여 심한 고민과 유혹에 빠져 있던 시인은 본 대목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발견한다. 시인은 배교의 유혹에 대한 뼈저린 투쟁을 겪은 후에 악인의 세속적 축복의 무가치함을 발견하고 성도의 궁극적 목적이 지상 세계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음을 자각했다(딛1:2). 이제 본연을 다시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디딤돌(15,16절):시인은 먼저 문제의 해결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자신을 지탱해 준 디딤돌을 먼저 언급한 뒤에 문제 해결의 핵심으로 진전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다른 형제들을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15절).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때는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을 억제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시인은 의심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고 불확실한 것을 성급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억제가 더 이상 그를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디딤돌이 되고, 여기서부터 문제의 해결이 시작되고 있다. 시인은 아직도 부조리한 세상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16절). 그러나 그는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심에 대한 표현을 유보하면서 해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회의와 낙심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해결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결코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는 매우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몸부림쳤다. 우리는 여기서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롬2:18). 시인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만 고착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결과를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2 승리에로의 전환(17절):배교의 유혹에 시달리던 시인은 여기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발견한다. 극심한 혼란 상태에 처해 있던 시인은 성소에 들어감으로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여기서 성소에 들어감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의미한다. 시인은 자기 앞에 닥친 유혹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하였고, 그 결과 응답의 축복을 받았다(출33:12,13;왕하13:4). 그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엄위에 사로잡히게 되고 드디어 그는 전에도 알았었지만 잊어버렸던 진리들을 기억하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비로소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자기의 이성과 사고를 통해 접근했을 때는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합리적으로는 생각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사고할 수 없었던 데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란 합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형의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하며 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인은 성소에 나갈 때 비로소 영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고, 그때에 자기가 모든 사실을 끝까지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시인은 단지 악인의 형통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악인의 종말론적 심판을 자각하면서 유혹을 극복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여러 모양의 시험이 닥칠 때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깨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해야 한다.
3 깨달음(18-20절):믿음의 눈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한 시인은 이제 원수들이 매우 위험한 위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은 의도적으로 2절과 대조시켜 완전히 상황을 역전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확신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우심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 그분이 악인을 파멸에 던지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다. 드디어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고 확실한 것임을 발견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잠시 주무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20절). 이것은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을 써,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악인들을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잠시 기다린다는 고백이다.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를 허용하며 악인들을 내버려둠으로써 스스로 정죄에 이르도록 하신다. 시인은 결국 악인들을 내버려둠으로써 스스로 정죄에 이르도록 하신다. 시인은 결국 악인의 형통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일부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악인들을 풀과 같이 속히 베시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하게 하실 것이다(37:2).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철저히 미워하시고(11:5;잠15:26)갑작스럽게 몰락시키실 것임을 확신하며(37:35,36) 배교의 유혹을 극복하게 되었다.
4 자시에 대한 반성(21,22절):세상주의의 미혹(迷惑)을 극복한 시인은 이제 자신이 정결하고 무죄하다고 주장하는 자만에서 벗어나 무지한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인간적인 슬픔으로 인하여 그 문제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과 불평에 함몰되었던 자신의 근시안적 태도를 자책하면서 회개하였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문제의 원인이 외부적 상황에 있지 않고 바로 자신에게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사실 언제나 자아(自我)가 말썽을 일으킨다. 마음이 흔들리고 왜곡된 생각을 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적인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시인은 성소 안에서 자기가 인간적 자랑과 욕망과 감정에 의해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닥치는 고난과 역경이 좌절과 절망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더욱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들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욥42:1-6;롬5:4;히5:14;벧전1:7).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로 인해 잠시 흔들렸지만 결국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성숙하게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우리도 시인처럼 삶의 모든 상황들을 활용하여 더욱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5 시인의 변화된 관점(23-26절):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신을 성찰한 시인은 드디어 새로운 관점을 소유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4-7절에서 악인들의 현세적 형통에 관심이 있었던 시인은 이제 대조적으로 하나님에게로 그의 관점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고난과 고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만이 그의 진정한 소원이라고 고백한다(25절). 또한 하나님께서 삶의 전반에 항상 동행하여 주시는 기쁨을 노래한다(2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지키시고(31:23;37:28;수24:17;삼하8:6)바른 길로 인도 (출13:21)하시는 분이시다. 시인은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로 나아간다(25절).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을 통해 시인은 주밖에 도우실 분이 없고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어루어지지 못할 때 다른 모든 것들도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기초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시인은 하나님 자체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축복에 더 관심이 있는 자신의 태도가 문제의 핵심이었음을 뼈저리게 경험한 후 드디어 하나님 자신을 더욱 사모한다고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삶의 기초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는 것 같은 날이 올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탱해 주실 반석이며 영원하신 팔임을 고백한다.
6 새로운 결단(27,28절):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을 직시는 데 이른 시인은 마지막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궁극적인 심판과 축복에 대한 확신을 피력한다. 그는 이미 악인의 종국적 멸망과 의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총력 매진(邁進)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쓰라린 체험을 되돌아보며 자기의 잘못과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한 데 있었음을 자각하고 새로운 헌신과 결단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인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로 결심한 최종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선포하기 위해서다(28절). 사람의 최고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도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합리적 사고에서 영적인 사고로 전환됨으로써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인간의 머리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을 확고하게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2:12;잠16:20).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불신앙에 빠진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골1:23;딤후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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