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에 내린 형벌 (이사야 29:1-8)
여기에서 "아리엘" 이라 불리우고 있는 곳은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왜냐하면 아리엘은 다윗이 거한 성읍이라 했기 때문이다. 또 그 도성의 일부가 "시온" 이라 불리웠는데, 시온은 특별한 면에서 다윗성이었고, 그 안에는 성전과 궁전이 모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리엘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이 당시에는 그 이름과 이유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성읍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별명과 애칭을 갖고 있었다. "아리엘" 은 "하나님의 사자" (lion) 또는 "강한 사자" 를 의미한다. 사자가 짐승들의 왕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은 성읍들의 왕으로서 그 주위의 모든 성읍에게 법을 주었다. 또 그것은 "큰 왕의 성" 이었다(시 48:1, 2). 그것은 "새끼 사자" 라 불리우고 있으며(창 49:9), 그 군호가 사자였던 유다의 중심 성읍이었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사자인 분은 또한 유다의 영광이었다. 예루살렘은 때로 그 이웃 민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의로운 성읍이었을 동안에는 사자처럼 담대했다.
혹자는 "아리엘" 은, 사자가 그 먹이를 삼키듯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삼킨 "하나님의 제단" 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윗이 거한 성읍에 있는 그 제단에 화 있으리로다라는 말이다. 그 제단은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성전과 함께 훼파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 예루살렘으로 보고 싶다. 그것이 더 자각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이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처럼 여기에서 반복되어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Ⅰ. 예루살렘의 환란이 예고되어 있다. 예루살렘이 사자처럼 강한 성이요, 하나님의 사자처럼 거룩한 성이긴 하지만, 거기에서 불의가 발견된다면, 거기에도 재앙이 내릴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 이다. 그 사실이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의 교회의 한 상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임재하시는 것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 안에 이스라엘의 증거 궤와 "다윗의 집의 보좌" 가 있었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는 근거로 언급되어 있다.
1. 외적인 종교적 행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해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1절).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리라. 너희는 연중 잔치를 계속하고 너희 모든 남자들은 법도와 관례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 년에 세 번 여호와 앞에 헌신하라. 그리고 그들이 이 의식 중에 어느 것도 결코 빠뜨리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늘상 그렇게 해오던 대로 제물을 잡게 하라. 그러나 그들의 생활이 개혁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이 겸비케 되지 않는 한,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해서 노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그의 분노를 돌리게 하려는 생각은 갖지 않게 하라."위선자들도 경건한 훈련의 궤도를 꾸준히 밟는 자의 모습으로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것으로 즐거워하나,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그와 화목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그에게 나아오신다는 것을,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를 징벌하실" 것이라는 사실을(6절) 알게 하라. 그의 죄는 조사되고 처벌될 것이다.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으로, 전쟁의 놀라운 경보와 비참한 황폐로써 그들에게 갚으실 것이며, 그것은 "벽력과 지진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 같을 것이고, 특히 "큰 소리" 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외적이 국경 지대가 아니라 그 나라의 심장부에 와서 고함을 치고, 약탈하며, 모든 것을 황폐케 할 때(특히 랍사게의 처신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 지휘자들이 매우 오만하기 때문에 그 병사들도 의심할 바 없이 더욱 더 거칠었던 그 앗수르 군대와 같은 자들은 그렇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폭풍으로 자기들을 징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 "큰 소리" 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이상으로 겁을 주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세부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사람들이 우리를 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는 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 "슬퍼하고 애곡하리라. 그들은 회개하고 개심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며 그 때에 그것은 내게 있어서 아리엘과 같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본래와 같이 될 것이며 내게 다시 예루살렘, 곧 거룩한 성읍이 될 것이다." (1:26).
Ⅱ. 예루살렘의 대적들의 멸망이 예고되어 있다(5, 7절). 이것은 이러한 환란 속에서도 예루살렘의 친구가 되었고 또 예루살렘이 잘 되기를 바라던 모든 사람들을 안위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낮아져서(4절), 땅에서 말하리라. 그처럼 네가 비천하게 될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네 대적의 무리와 강포한 자의 무리 곧, 그 대적의 무수한 군대는 전혀 말할 수 없는 또는 낮은 소리로도 말할 수 없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바람에)불려가는 겨 같으리라. 네가 낮아짐을 당할 것이나, 그들(원수들)은 완전히 흩어짐을 당할 것이며,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27:7). 그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그 일이 경각 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리라. 그 대적들은 멸망에 놀랄 것이며, 너는 구원에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앗수르 군대는 한 천사에 의해서 현장에서 갑자기 몰살을 당했다. 복음의 예루살렘의 대적들의 멸망도 그러할 것이다. "한 시간 내에 그들의 심판이 이를 것이다" (계 18:10). 그리고 다시(6절), "여호와께서 너(한글 개역은 - "그들을")를 징벌하실 것이라. 또는(일반 번역처럼) 그녀(도성이나 나라는 여성임 - 역주)를 벽력과 큰 소리로 징벌하실 것이라. 네가 하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또 하나의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7절)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는 밤의 환상(꿈) 같이 되리라. 그들과 그들의 형통함이나 성공은 곧 무너질 것이다." "시온을 치는 열방의 무리는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여전히 배고픈 것같이 될 것이다.
1. 즉 그들이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그 부유한 성읍을 노략함으로써 스스로를 부유케 하기를 원했던 것에 반하여, 그들의 소망은 헛된 꿈이었음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들은 그 소망으로 그들의 상상력을 즐겼고, 잠시 스스로를 위안할 수도 있으나, 마침내는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리라고 상상했으나,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고 포위당하게 하실 때 내릴 진노에 대한 경고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다에 대한 위협 (이사야 29:9-16)
Ⅰ. 그 예언자는 유대 민족의 대다수가 어리석음에 놀라고 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선한 지식" 을 가르치며, 또 히스기야로부터 그러한 일을 하라는 격려를 받은(대하 30:22) 레위인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직접 그들에게 전해 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원인과 그 결과는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는 예언자들이 있었다. 혹자는 하나님의 계시는 온갖 혜택을 받고 있는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리리라고" (신 4:6)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완전히 그 반대였다(9절). 그 예언자는 그들이 그 이웃들의 보편적인 경솔함을 좋아하고 있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있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기를 지연시키고 미루나, 너희는 그들이 그처럼 어리석은 것에 놀라리라. 그들은 그들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스스로를 희롱하고 있다. 그들은 술마시고 법석을 떤다. 그러나 너희는 부르짖으라. 그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라.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들을 치려는 하나님의 손을 그들이 깨닫지 못할수록 너희는 더욱 이것들을 마음에 두라."
죄인들이 안심하고 죄의 길로 행하는 사실은, 마땅히 모든 진지한 백성들에게는 탄식과 놀라움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 문제는 무엇인가? 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1. 백성들의 대부분이 마치 취한 자처럼 멍청하고 야비하며 얼빠진 상태였다는 사실에 이루가 놀랄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즉 포도주를 이따금씩 마시지만, 포도주만으로 인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포도주로 옆걸음 쳤다" (28:7). 그들은 향락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대한 편견과 그들이 섭취한 부패한 교훈으로 인하여 취했다. 술취한 자들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거나 말하는 것과 또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책망을 깨닫지 못한다. 취한 자는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다" 고 말한다(잠 23:35).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꾸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취한 자처럼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고, 법도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그 계획에 있어서 "비틀거리며" 불안정하고, 꾸준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들의 길에 놓여있는 모든 것에 걸려 넘어진다. 영적인 술취함과 같은 일도 있다.이 사실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했고, 계속 불신앙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마침내는 극도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 고 했다(롬 11:8). 복음의 빛 가운데서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비참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3. 지도자가 되어야 할 그들의 예언자들과 치리자들과 선견자들이었던 자들 자신이 눈멀었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어떤 치명적인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말하기는 쉬운 일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후반기에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큰 반대자였고, 그들 자신이 재판상의 혼돈에 빠졌던 그 때에 이루어졌다.또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다. 예언책이 그들에게 봉한채로 전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당연한 심판의 하나로서 그것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흔히 그들에게 봉해진 채로 전달되었고, 그들은 그 말을 배우기 위해 수고하지 않았다. 그리고서 그들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읽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신으로 해서 그 마음이 눈먼 너희에게는 (하나님의)묵시가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지는 않다. 네게는 죽음에서 죽음에서 이르는 향기가 되는 바로 그 묵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식은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쉽다.
Ⅱ.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경고를 가하고 있다(13, 14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들이 책망받고 있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종교적 행위에서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이다(13절). 인간의 마음을 알고 있으며, 외양과 가식으로 속임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가책을 받든 안받든 그들을 책망하신다. 마음보다 크시며 만물을 아시는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그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그를 존경하나", 신실된 경배자들이 아님을 알고 계신다.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에게 우리의 숭앙을 바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용무가 있으며, 그 예를 통해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려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간다. 입과 입술로써, 즉 하나님을 (남에게)말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술의 (한글 - 입술을 대신하여) 수송아지를 주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호 14:2).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풍성함을 우리의 입이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이 입 운동으로만 그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그를 숭앙하는 것에 대해 말하나, 그것은 오직 겉에 붙어 있는 이빨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Ⅲ. 하나님을 떠나서 은밀히 행하려 하며,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수행하고 모든 것을 보시는 그의 눈에서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을 계획하려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밝혀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의 책략이 묘사되어 있다(15절). 그들은 "자기들의 도모를 여호와께 (서 모르시게) 깊이 숨기려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행하거나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보리요? 아무도 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도 보시지 않는다" 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상의했고 결코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그에게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신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낭패케 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을 것이다.죄인들이 죄악된 방식으로 행하는 수고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익한가를 그들은 하늘에 앉으셔서 그들을 비웃으시는 여호와께 자기들의 계획을 깊이 숨기려 한다. 세속적인 숭배와 위선에 대한 세속적인 신뢰의 밑바탕에서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실제적 불신앙이 깔려있다(시 94:7; 겔 8:12; 9:9).
2. 그들의 책략의 어리석음이 입증되어 있다(16절). "아래 위가 뒤바뀐 사물을 뒤바꾸려 하는 너희들(한글 개혁과는 다소 다름. 역주), 즉 너희가 원하는 모양으로 일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사건을 뒤바꾸어 꾸민 여러 가지 계획들,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너희 계획에 이용하려고 생각하여 사물의 질서를 바꾸는 것은 - 그것은 사물을 완전히 전도시킨 것이요, 잘못된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토기장이를 진흙같이 여겨지리라.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자기 진흙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과 같이 매우 쉽게 그리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너희와 너희의 모든 계획을 주관하실 것이다. 하나님 없이, 특히 하나님께 도전하여 계획을 꾸미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무시하는가를 보라.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이사야 29:17-24)
자기의 의사를 여호와께 감추려 하는 자들은 사리를 그릇친다고 했다(16절). 그리고 그들은 그 의사를 하나님이 모르게 하려고 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서 자기의 행위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시겠다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와 그들의 말 중 누구의 말이 설 것인가를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 "잠시 기다려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며, 그 속에 있는 모든 변화를 그의 교회에 유익하도록 지시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가시적(可視的)인 증거에 의해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 예고된 놀라운 혁명은 원칙적으로는 산헤립의 시도가 죄절된 후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태가 잘 해결된 사실과, 선한 백성들이 전쟁과 핍박의 칼에 대한 놀람에서 구원받게 되자 누리게 될 안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복음이 처음 심겨졌을 때, 유대인의 거부(왜냐하면 그들의 위선됨과 불충실성이 13절에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Ⅰ. 일반적으로 말하면, 여기에 예고되어 있는 것은 크고도 놀라운 변화이다(17절). 삼림이었던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리라" 고 했다. 그리고 기름진 밭이었던 갈멜이 삼림으로 될 것이라 했다. 이것은 상호교체이다. 더 나은 것이든 더 나쁜 것이든지 간에, 큰 변화가 흔히 삽시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땅이 보통 때 이상으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은, 산헤립이 패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한 징조였다(37:30).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니라" 고 했다. 즉(짐승과 같이) 사람이 토양의 자연적인 산물을 먹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후 실제로 레바논은 기름진 밭이 되었다. 레바논이 너무나 비옥해졌기 때문에, 보통 때는 레바논에 비교하여 기름진 밭으로 간주되곤 했던 곳이 이제는 단지 삼림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추수되어 이방인들 중에서 그리스도께로 크게 모여 들게 되자, 광야는 기름진 밭으로 변했다. 한편 오랫동안 기름진 밭이었던 유대 교회는 황무하고 버려진 숲이 되었다(54:1).
Ⅱ.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무지했던 자들이 총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18절). 이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들(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인봉된 책이었다)이 예언이 성취되면, 그 때에는 그것을 깨달을 것이며, 그 사건에 속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예언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다." 예언의 성취 자체가 그 예언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설이 된다.그 때에 불쌍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흑암 가운데 앉았던 자들은 큰 빛을 볼 것이며, 소경의 눈이 어두운 데서 나와 볼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들에게 보내져 "그 눈을 뜨게 하였기" 때문이다(행 26:18). 사람들을 선한 감동을 받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다루는 과정은, 바로 하나님의 책에 대한 그들의 총명을 열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알아듣게 하는 것임을 주목하자.
2. 그릇되었던 자들이 올바른 자들이 될 것이라 했다(24절). "마음이 혼미하던 자," 즉 그 책의 말씀과 그 의미를 오해하고 있던 자들이 총명하게 된다. 즉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리의 영이 그들의 잘못을 교정해 줄 것이며,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저질렀고 속임을 당한" 자들도 총명하게 만드실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만드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라고 원망하고 트집을 잡아내기를 좋아하던 자들이 그 교훈의 참 뜻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그들을 그것을 더욱 달게 받을 것이다. 공적인 일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과오를 범하고 그 시여에 원망하던 자들은 일의 결과를 보게 되면 그것을 더 잘 깨닫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의도하고 계신 바를 알게 될 것이다(호 14:9).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진실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은 멀지않아 그를 더 크게 기뻐할 이유를 얻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의 기쁨이 감소되고 시들어갈 때,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은 증가되고 그 터를 확보한다.
스스로 빛나는 이 광명은 더욱 더 빛날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되고 있는 바는 "이 기쁨이 충만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중 빈핍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며, 그들이 빈곤하다 하여 그것이 그 기쁨을 그들에게서 뺏지 못할 것이다(합 3:17, 18). 그리고 온유한 자, 겸손한 자, 인내하는 자, 그리고 노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 기쁨이 불어날 것이다.
온유함이라는 은혜는 우리의 거룩한 기쁨을 증가하는 데에 매우 기여하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4. 거대했던 대적들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 "강포한 자" 산헤립과 그의 큰 군대는 "소멸될" 것이며(20절), 더 이상 악을 행할 능력은 전혀 없어질 것이다. 정말로 강포한 자인 사탄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보금이 전파됨에 따라 꺾일 것이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하던 자들은 해방될 것이다(히 2:14, 15).그들은 예언자들이 경고하는 식으로 그들에게 한 말은 비록 순수하고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이었지만 말마다 트집을 잡았다. 그들은 그가 말한 것을 가장 나쁘게 해석하며, 억지로 왜곡시킴으로써 그 말을 범법으로 만들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분별없이 말하기 쉽고 들은 말을 오해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을 말 한 마디로 범죄자로 삼는 (한글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는 - 역주) 것은 매우 부당하고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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