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받는 포도나무(에스겔 15:1-8)
우리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도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온 천하의 희락이요 면류관이었다(시 48:2; 애 2:15). 그러므로 그런 성의 멸망은 얼마나 가련할 것인가 ! 그것은 고귀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도성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엄숙한 의식이 베풀어지는 성이었다. 에스겔의 마음속의 생각들이 그렇다고 할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면서 그런 생각에 대한 답을 들려 주신다.
1.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가 다른 어느 수목보다 귀중한 것은 사실이다. 포도나무 역시 나무들의 왕이 되도록 요청받았고 그 열매는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한다(삿 9:12, 13).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시 104:15).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은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식수되었다(렘 2:21). 만약 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성으로서 그 특성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수가 심으신 포도나무요 마른 땅에서 난 가지였다. 비록 그 근본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하니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강하게 만드시고(시 80:15) 자기의 이름과 칭예가 되게 하셨다.Ⅰ. 이 비유는 여기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숲 속의 나무들 중에 있는 포도나무 또는 삼림처럼 열매 맺지 못하는 빈 포도나무(호 10:1 참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런 야생 포도나무는 찔레 처럼 무용지물이다. 아니, 찔레는 그래도 가시 울타리에 쓰이기라도 하지만 포도나무 가지는 그런 데도 쓰이지 못한다.
1. 그 포도나무는 아무 용도에도 적합치 못한다. 그 나무를 가지고는 아무 것도 제조하지 못한다. 그릇을 걸 못 하나도 만들 수 없다(3절). 자연의 선물이 얼마나 다양하게 인간을 위해 사용되는지 생각해 보자. 식물 중 어떤 것은 뿌리나 씨앗으로 또 다른 것은 열매 또는 잎이나 줄기로 우리들에게 유용하다. 떡갈나무나 삼목처럼 견고하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도 있고 포도나무처럼 약하면서도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도 있다. 포도나무는 볼 품없이 생겼고 키가 작으며 무엇에 의존하는 나무지만 크게 유용하다. 라헬은 아름다웠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고 레아는 소박하게 생겼지만 자식을 많이 낳았다.Ⅱ. 이 비유가 어떻게 예루살렘에 적용되는가?
1. 거룩한 성은 무익하게 되고 아무 것에도 쓸모없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포도밭의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같이 의의 열매가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었다. 거기서 경건한 신앙이 번성하며 순수한 하나님 예배가 지속될 때는 많은 희락의 포도 송이가 수확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 주변에 울타리를 치셨다. 그것은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였다(사 5:7). 그는 때때로 물을 주시며 밤낮으로 그것을 간수하셨다(사 27:3). 그러나 그렇던 것이 이제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 곧 야생 포도 넝쿨(왕하 4:39 에서처럼)이 되었으며 살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것은 야생이기에 들포도를 맺는 나무이다(사 5:4). 그것은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욕지기 나게 하고 유독하다.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는 쓰다" (신 32:32). 이것은 8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는 저희가 범법함이니라." 그들은 패역하게도 하나님께 얼버무리며 불충하게도 그에게서 이탈했다. 만일 신앙고백자들이 그 고백대로 살지 않고 도리어 그 고백과 모순된 행동을 하며 거기서 타락하고 이탈한다면 그들은 맛을 잃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소금처럼 세상에서 가장 무익한 존재가 된다(막 9:50). 다른 나라들은 용맹이나 계교 또는 전쟁이나 무역으로 유명했고 그 명성을 보유했지만 유대 민족은 거룩한 백성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거룩함을 상실하고 악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 데도 쓸 데 없는 민족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신망과 유용성을 잃었고 따라서 천하에서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이방인의 발에 밟히울 뿐이었다. 다니엘과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당대에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우상 숭배하던 유대인과 복음 선포 후 이제까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과거나 현재나 제조에 아무 소용도 없으며 공공복리에 유용하지 못하다.한 가지 심판의 끝은 다른 심판의 시작이 될 것이며 한 가지 심판에서 피하는 것은다른 심판이 올 때까지의 유예에 불과하다. 그들은 본국의 불행으로부터 바벨론의 불행으로 옮길 것이다. 칼의 길에서 나온 자들은 기근이나 역병으로 멸망했던 것이다. 갈대아 군대의 습격이 한 차례 지나면 그들은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삼상 15:32)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면 그들이 다시 맹렬히 돌아와 완전히 끝을 낼 때까지 공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는 나를 여호와 곧 전능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나님은 순종하는 백성의 구원과 아울러 화해할 수 없는 원수들을 멸망시키심으로써 자기가 여호와시라는 것을 나타내신다는 데 유의하자. 하나님의 대적을 받는 자들은 비록 거의 피혜를 입지 않고 한 가지 환난에서 나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환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함정에서 올라오더라도 올무에 걸릴 것이다(사 24:18). 그들이 비록 하사엘의 칼을 피하더라도 예후의 칼에 쓰러질 것이다(왕상 19:17). 왜냐하면 재앙이 죄인을 따라가기 때문이다(잠 13:21). 아니, 그들이 비록 현세적 심판에서 나와서 평안히 죽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을 사를 영원한 불이 있다는 점을 유의하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이기실 것이며 그는 자가가 행하시는 심판으로 알려지실 것이다(마 3:10; 요 1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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