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1) (요한 1서 2:1,2)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이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죄를 언급하고 있는 1장의 결론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아울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말하고 있다.
Ⅰ. 첫째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죄지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이 서신의 의도와 목적, 즉 나와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불신앙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시킴에 대해 언급한 의도는 저희로 하여금 죄를 금하고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애정에 넘치는 사도의 권고를 들어 보라! "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바된 자녀들, 또한 연령과 경험에 있어서 사도 보다 좀더 어린 자녀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 이렇게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흘러 넘치고 있는 곳에 또한 그러한 때에 확실히 복음은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되었다. 아마도 사려 깊은 독자는 이러한 금지와 경고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의도는 바로 아래와 같은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한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죄의 확실한 용서에 대한 언급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에 대한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통회 자복을 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이를 씀은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곧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함이다. " 한편 사도는 죄인들을 위한 대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즉 예상할 수 는 대로 그것은 실수와 의식적으로 짓는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 너희가 죄를 짓게 하려 함이 아니다. 너희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 그러나 아래와 같이 잘못된 생각(마치 어느 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 곧 "그러나 사람은 죄를 짐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Ⅱ. 죄 가운데서 믿는 자가 받을 도움과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만약 누가 죄를 범하면(우리 중 누가 혹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사귐이 있는 자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1절)라는 말씀을 주시해 보자. 구원의 복음 가운데 속해 있는 신도자신들도 아직은 죄 가운데 있다. 그러나 세상의 죄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세상에는 기독교화된 자(그리스도의 신비적이며 영적인 몸에 대해 거룩한 구원의 특권 아래 있는 자)와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자, 즉 중생한 죄인과 중생하지 못한 죄인들이 있다. 진실로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죄를 짓지 않은 자로 간주되어진 사람들이 있다(3:9). 곧 신도들은 용서와 의롭다하심을 입게 하는 하늘의 대언자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죄 중에 있는 신도들에게(혹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과 속죄 그리고 피난처가 되신다. 곧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 " 대언자란 말은 간혹 성령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성령은 보혜사(위로자)로 호칭되기도 하며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을, 입에는 변론을 가져다주신다. 그가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들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 대언자의 맡은 바 사명과 책임은 심판자를 향한 것이다. 심판자 앞에서 그는 소송 의뢰인의 소송 사유를 변호해 준다. 심판자는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가 되시며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는 복음의 법정(범법자를 다스리는 법정) 곧 하늘나라 법정 또는 은혜의 법정에 서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의 왕좌와 심판석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자리가 된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현세에 있어서나 생사 문제 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최고의 심판자가 되신다. "너희는 만민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이르렀느니라"(히 12:23). 신도들은 그들의 소송 사유가 성립되면 대언자는 그들에게 힘이 되도록 아래의 몇 가지 신분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1. 대언자의 인격과 그 이름으로 나타내 주고 싶다. 곧 그는 중보의 절대적 사명과 구원의 온전한 역사 그리고 중재자와 대언자의 사명 성취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2) (요한 1서 2:3-6)
이 구절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장 7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나타난 구절들과 1장 7절 말씀 사이에는 죄중에 있는 신도의 의무와 구원에 관한 토론이 대두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신도의 특권 즉 중보자의 피로 말미암아 죄에서 깨끗게 함을 얻는 특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서 행함으로 얻는 유익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거룩한 사귐과 친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권이 된다. 여기서 빛과 사랑을 따르는 데에는 또한 증거가 따라야 한다.
Ⅰ. 빛에 대한 시험.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3절), 하나님의 빛과 지식은 마음의 아름다움과 진보를 말한다. 지혜와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중보자)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빛을 과대 평가하며, 그들 자신이 갑자기 짧은 기간에 얻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쉽다.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만족할 만큼 충분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며 복음의 많은 내용을 알고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지식만이 우리들의 지식이 건전하고 완전하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그의 권위를 이룩케 한다. 즉 지혜로운 생각과 풍성한 은혜 그리고 위대한 그의 역사가 그의 율법과 나라를 권위 있게 만든다. 주의 깊게 그의 계명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룩케 한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영혼 속에 은혜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4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진리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가끔 그들의 무지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때로는 그 진리를 소유했다고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다. 곧 그들은 간혹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부한다. "네가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자요…"(롬 2:19). 그러나 하나님을 보다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의 대상이 됨을 깨닫지 못하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나타나고 알려진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마음을 순종으로 이끌지 못하게 될 때 이 지식은 얼마나 헛되며, 또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순종하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신앙적인 지식에 대한 면박과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러한 자신의 자랑과 구실에 대해 거짓말임을 폭로하며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신앙이나 진실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Ⅱ. 사랑에 대한 증거.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5절).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곧 삶의 길과 동기를 거룩하게 만든다. 말씀을 지키므로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며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의 말씀을 실제로 지키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케(또는 그 사랑의 온전한 의도와 열매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들은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자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우리는 선한 일을 이루도록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되었다. 즉 거룩하신 성령으로부터 좀 더 완전한 성화에 참여하도록 용서함을 받고,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우리들은 거룩과 복종의 길을 행하도록 성결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건히 접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의 온전한 경건과 결과 내지는 효과를 이룩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즉 15절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고 하신 3장 17절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지금 빛은 사랑의 촛불을 켜들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며, 또한 지키게 될 것이다. 그는 항상 기뻐하며, 섬김을 받고, 하나님의 선포된 뜻을 지키기를 기뻐하며, 또한 섬기기를 즐긴다. 여기에서 사랑은 활용되어지며 또한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이로써 사랑은 자태를 나타내게 되며, 사랑의 완전한 효능과 힘,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이로써(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뜻에 충실히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안에 있음을 알게 되며, 5절) 우리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와 함께 연합되어 있음을 인정한다면 아래와 같이 우리에게 강권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거하시는 분이요, 또한 이 곳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와 더불어 행하며, 또한 그가 보여 준 표본과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한다. 옛날 몇몇 철학파에 속해 있던 무리들은 그들의 존경할 만한 선생들과 학파의 요원들의 가르침과 행실에 대해 크나 큰 존경을 했다. 그리스도 안에 또한 그와 함께 거하기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 그의 변치 않는 주와 대장을 닮도록 하며, 그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신(요 5:4) 말씀대로 그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세상의 사랑(1) (요한 1서 2:7-10)
7절은 바로 앞서 기록한 바(여기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옛 계명으로 나타나있는 바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사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끌어 온 것을 확실히 가르치고 있음을 말한다.)를 돌이켜 보거나, 또는 사도가 말하려 하고 있는 것과 형제애에 대한 법을 미리 예견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케 하는 귀절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전하여진 메시지이며(3:10), 옛 계명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고를 시도하면서 아래와 같은 사랑에 넘치는 칭호로써 교훈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 곧 너희에게 간청하는 바 사랑으로 피차 결속되어진 것 가운데 있는 사랑스러운 자들이여!" 이러한 칭호로 시작해서 그들에게 형제애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Ⅰ. 옛 계명으로써의 교훈.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7절). 사랑의 교훈은 인간의 본성이 오래된 것과 같이 옛 것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가지의 규율과 시행(enforcement) 그리고 동기를 수락해야 한다. 만일 순수한 가운데 인간의 본성이 전달되었다면, 인간들은 한 피를 나눈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 위에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죄의 상태에서 또한 그 죄를 사함 받으리라는 약속 안에서 그들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자로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피를 나누고 그들과 동일한 소망을 나누는 자로서 서로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히브리인들은 각별히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언약과 선택함을 받고 그들로부터 메시야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나신 바 특권이 부여된 민족으로서 피차간 사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의 법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새로운 의무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옛 계명 혹은 복음적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처음부터 들은 바 있는 말씀이다(7절).
Ⅱ. 새로운 계명. "또 다시 저희에게 이러한 의무를 더욱 일깨워 주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 즉 저희에게도 참되며 그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가장 참다니 새로운 공동체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법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다. 곧 새로운 공동체의 진리는 그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며 또한 풍부하게 있었다. 그가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그것은 너희에게 참된 것이다. 이 법은 너희 마음 안에 얼마간 이미 기록되어 있는 법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배웠다. 이는 더구나 이미 어두움이 즉 저희의 중생하지 못한 마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무지가 지나갔고, 진리의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8절). 복음적인 계시의 빛이 생명과 크나큰 힘으로 저희의 마음에 비치었다. 기독교의 사랑의 탁월성을 안 이상에는 이로써 기본적인 의무를 안 것이 된다. "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특별히 기본적인 교훈)을 알게 되면 새로운 것이거나 옛 것이거나 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 개혁된 교리 또는 개혁된 신앙은 새 것이며 동시에 옛 것에 속하는 것이다. 새 것이라 함은 지루한 어두움 후에 개혁의 빛으로 말미암아 깨우쳐진 것이요, 로마의 변조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을 받은 바 새 것을 이름이다. 그러나 옛 것은 처음부터 배웠고 또한 들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었던 은혜와 능력은 또한 우리 안에서도 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머리에 일치될 수 있다. 어두움이 지나갈수록 또한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면 비칠수록 옛 것이든 새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더 순종하기에 이르게 된다. 빛은 적당한 열을 발산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빛에 대한 하나의 시련이 있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인정함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
1. 이러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자는 그의 빛을 헛되이 받은 자들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다"(9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루신 일들을 수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 안에는 사실 이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자들이 종종 있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감화를 미쳤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믿는 형제들을 계속 미워하며, 적의에 찬 행동을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형제를 대하도록 감동을 입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중생함을 입은 척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세상의 사랑(2) (요한 1서 2:12-17)
거룩한 사랑에 대한 자극적인 어조로써 이루어진 이 새로운 지시는 여기에서 언급되어진 바 제자들의 몇 가지 계층에 대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카톨릭 교회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피차간 신성한 사랑 안에서 결속을 유지해 온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생명력 있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결속될 수 없기에, 서로 지켜야 할 중요한 금지와 권고가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학교(교회)에서 사랑을 몇 가지 형태의 교훈으로 우선 정정당당히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린아이나 미성년자, 성인 또는 연장자(teleioi)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고 있다.
Ⅰ.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형태와 계층에 따라 주어지는 권고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위치와 신분에 있지 않다. 즉 그리스도 안에는 애기들이 있는가 하면 성숙된 사람들과 노년층이 있다. 이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상태에 있는 것같이,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각별히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는 가운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교훈과 상응하는 복종이 주어지고 있다. 현명한 목회자는 주의 깊게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그리스도의 권속들에게 그들이 차지할 몫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자녀들과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인 너희에게 편지하노라." 이렇게 계층에 따라 사도는 아래와 같은 권고를 하고 있다.
1. 기독교 학교(교회)에서의 초보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12절), 여기에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단계에 이르고 있다. 초보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들과 같은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소자들에게 일러 준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성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보적인 원리는 반복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Ⅱ. 생명적인 종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경고가 되는 훈계와 충고가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절).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물욕과 세상의 향락을 억제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이 교훈 안에서 합치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합리 되었다면 그들은 즉시 또 다른 동기에 일치하게 된다. 즉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사랑을 소비하지 말라. 여기에서 이러한 충고와 주의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권고의 필요성은 불가피하다. 제자들 스스로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금하도록 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권고의 동기는 아래 몇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5절), 인간의 마음은 좁아서 두 가지 사랑을 모두 포함할 수 없다. 세상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끌어내린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더하면 더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감소하며 시들어 버린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 (요한 1서 2:18,19)
Ⅰ. 여기에서 "때"에 대한 예시가 나타나 있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18절). 우리들은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한번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항상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신앙에 있어서 어린 상태에 있는 아이들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타이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주기 위한 호칭이 될 수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곧 교회나 국가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모든 무리는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다. 모세의 제도와 교훈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또한 다니엘의 때(weeks)는 끝나 가고 있으며 히브리인들의 성읍과 성소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밀려남 같을 것이며, 또한 전쟁이 있으리니 크게 황폐할 것이다"(단 9:26). 제자들이 때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며 예언적인 종국을 설명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Ⅱ. 이 마지막 때의 징조는 무엇인가? 이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18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나라를 대적한다. 적그리스도가 용납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섭리 중에 하나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를 경우 제자들이 적 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목회자들은 이스라엘 집을 지키는 파수군들이다. 이러한 적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타격이나 손실이 될 수 없다.
1. 적 그리스도의 도래는 이미 예언된 바로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바와 같다"(18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지속적이며 숙명적인 적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났다(살후 2:8-10). 그러므로 이에 대한 많은 전조와 증거가 나타났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지금 악한 일을 이루고 있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Ⅲ. 미혹자들 또는 적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 좀 더 적극적인 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한 때 사도적인 교훈을 받아들이며, 또한 이 교훈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우리들의 동료와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 교회로부터 나갔다"(19절). 가장 순수한 교회는 배교자와 배신자를 가지게 된다. 사도적 교훈이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적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 (요한 1서 2:20-27)
Ⅰ. 사도 요한은 미혹자들이 성행하는 위태로운 시대에 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즉 배교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 격려하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름으로 말미암아 부요해지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너희가 기름 부음을 받았느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은혜의 기름과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와 온갖 영적인 선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들로서 주님의 사명과 흡사한 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성령은 불과 물이라고 비유될 수 있는 것같이, 기름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은 곧 기름 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 이는 거룩하신 자로 이러한 축복은 거룩하신 자, 성령 혹은 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계 3:7). 두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하심에 있어서 탁월하신 자다. 주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 자신과 같도록, 또한 그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Ⅱ. 사도는 본서를 기록한 의도와 뜻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1. 첫째로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가 본서를 기록한 의도가 그들의 지식을 의심하거나 복음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다(21절).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희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할 수도 없으며 또한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경하할 만한 것이 못된다." 믿는 형제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들의 추측을 뒤엎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주시해야 한다. 즉 신앙인들에 대한 정당한 신뢰는 그들의 신실성을 더하게 하며 고무시키는 결과가 된다.Ⅲ. 사도는 새로 일어난 미혹자들을 또 다시 소추(訴追)하며, 고발하고 있다.
1.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거룩한 진리에 대해 지독한 반대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누가 거짓말쟁이, 아니 누가 악명 높은 거짓말하는 자이겠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거짓되며 거짓말하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세상에 유포된 낭설은 가장 유해하며, 오래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허위와 거짓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 무결하게 증명되어진 진리는 없다. 오히려 혹자들은 진리에 반대하며, 또한 진리를 부인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에 의하여 증거 되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는 강한 미혹에 버려짐을 당한 자가 있는 것 같다.Ⅳ. 여기에서 사도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들리어진 옛 교훈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24절). 진리는 오류보다 더 오래 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맨 처음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어떤 새로운 사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바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가장 확실한 것이며 이 진리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 끝에 얻어진 것으로 길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옛 것을 변호하며 이로써 또한 권고할 수 있다. 권고는 이러한 면에서 강화되어진다.
1. 기본적인 진리와 믿음을 고수함으로써 참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강림 (요한 1서 2:28,29)
거룩한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한 축복을 언급한 다음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라는 충고와 권고를 하고 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28절). 사도는 "어린 자녀"란 친절한 칭호를 반복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칭호는 작은 자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자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는 사랑으로 타이르고 이성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너희에 대한 사랑이 너희에게 인내를 가르치도록 우리를 강권한다. 이는 그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진리 안에와 그와 연합된 가운데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적인 특권은 복음적인 의무를 수반한다. 주 예수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 반대에도 저항하여 그와 함께 살아야 할 크나큰 의무를 지닌다.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강조되어진다.
1. 이는 주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은 여기에서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사실이다. 그가 다시 오시게 될 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의 탄생은 은밀한 중에 이루어졌다. 그는 태초로부터 나와 조용히 마구간에 누이셨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열려진 하늘로부터 임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를 봄으로써 담대함과 확신,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로부터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머리를 들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를 저버린 자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자처하고 구세주의 영광을 저버린 가운데 불신앙과 배신, 만용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를 저버림으로 소망과 기대에 반해 비겁과 위선과 모든 불의의 삶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함이다." 사도는 자기 자신도 그들의 수에 포함시키고 있다. "너희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있게 하려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m,n aivscunqwmen avpV autou/). 그가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그를 저버린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함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며,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임을 선포하면서, 그들을 어둠과 마귀와 끝없는 절망의 구렁이로 내던질 것이다(막 8:38). 사도는 동일한 충고와 권고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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